개심사(開心寺)는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1번지 상왕산(象王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 수덕사의 말사이다.
절의 창건은 654년(백제 의자왕 14) 혜감국사(慧鑑國師)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당시의 이름은
개원사(開元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서는 14세기 초반에 폐사되었는 듯 진정 천책(眞靜天址) 스님이 지은
"호산록(湖山錄)"에, ‘절은 이미 무너져 숲이 무성하게 자랐고, 다만 절 뒤편에 새로 지은 3칸짜리
부도전(浮屠殿)만이 있다.’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14세기 중반에 다시 중건하였는데, 1350년(고려 충정왕 2) 처능(處能) 스님이 중창하면서
지금처럼 개심사라고 했다.
조선에서는 1475년(성종 6) 충청도 절도사 김서형(金瑞衡)이 사냥하다 산불을 내서 절이
소실되었으나 이 해에 다시 중건했는데, 이 사실은 《조선왕조실록》 〈성종〉조에 보인다.
그 뒤 1740년(영조 16) 중수하였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1955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개심사 일주문입니다.
개심사로 올라가는 길 / 올라오고 있는 아래쪽을 향해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개심사로 올라가는 길은 충청도 산골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개심사 앞 방지(方池) / 나무 숲이 울창한 개울을 따라 한참을 오르다 보면 갑자기 앞이
터지면서 옆으로 긴 사각형의 연못을 만난다. 풍수지리에서 상왕산은 코끼리의 모양이다.
부처님을 상징하는 코끼리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 속세인 이 언덕에서 깨우침의 세계인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다리이다.
해탈문을 들어가기전에
개심사 안양루 앞쪽으로 걸려있는 현판, 예서로 멋스럽게 쓴 이 글씨는 유명한 근세 서화가
해강 김규진 선생의 글씨입니다.
안양루의 우측으로 간단하게 만든 해탈문을 지나 대웅보전 앞마당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대웅보전 / 맞배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규모로서, 1963년 보물 제14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41년 수리공사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여 조선 초 1484년(성종 15)에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각의 이름은 대웅보전이라고 했지만 안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모셨습니다.
앞의 누각 이름이 안양루인데 안양은 극락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원왕생가(願往生歌) / 향가
달님이시여, 이제
서방까지 가셔서
무량수불 앞에
일러다가 사뢰소서
다짐 깊으신 불존에 우러러
두 손을 모아
원왕생 원왕생
그릴 사람 있다고 사뢰소서
아아, 이 몸을 버려 두고
사십팔대원 이루실까
-신라 문무왕(661-681)때 광덕(廣德)스님 지음-
우리 고찰순례단을 위해 개심사 주지스님이신 동덕스님께서 귀한 시간을 내어
법문을 해주고 계십니다.
심검당 / 조선 성종 15년(1484)에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앞면 3칸 옆면 3칸이다.
무량수각
산지 사찰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은 4개의 공간 즉, 불당, 선방, 강당, 요사가 각기 하나의 건물을
차지하여 4채가 口자로 둘러싼 형태가 된다.
강당(여기선 안양루)은 밖으로는 닫혀있고 안으로는 열려있는 이중성을 가짐으로써,
내부의 마당을 포근하게 감싸 외부의 세계로부터 지키는 역할을 한다. 건물 자체는
그 맞은 편에 있는 대웅보전과 같이 내부 전체가 훤히 터져 있는 단순한 구성을 가진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서방향으로 마주 보고있는 심검당과 무량수각은 수행처 및 요사로써
복합적인 내부 공간을 갖는다.
개심사 명부전 / 개심사는 영험 있는 지장기도 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명부전의 건립시기는
조선 중기로 지장신앙의 도량임을 알려준다.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개심사 명부전에 참배한 적이 있느냐고 반드시 물어 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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