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황사(죽장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을 하여 여러 연대를 걸처 중수해 오다가
몽고병란때 소실되어 없어지고 오층 석탑만 존재해 오다가 1952년에 조그마한
삼칸집에 부처님을 보시고 살던 계기로 지금의 서황사(죽장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법당에는 삼존불(석가모니불, 보현보살, 문수보살)을 모시고 외 5포, 내 7호의
팔작집을 하고 있으며 도량 가운데에 오층석탑(높이 10m의 국보 제130호) 감실
안에는 약사여래불 의 조그많고 당당한 모습이 기품이 있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5층 석탑으로 높이가 10m이며 5층 석탑으로는 국내 최대의 규모이다.
탑의 밑바탕인 기단부분은 18매의 잘 다듬은 돌을 지면위에 샇고 그 위에 상하 2중의 기단을 만들었다
1층 몽돌의 남쪽면에는 불상을 모시는 가로 66cm. 세로 107cm의 감실이 마련되었는데 최근에 모신 것으로 보이는 불상이 있다. 감실내부에는 문을 닫았던 작은 둥근 구멍이 남아있다
이 탑의 지붕돌 경사면이 층단을 이루는 형태는 벽돌탑(전탑)에서 불 수 있는 것으로 일반형 석탑에서 나타나는 것은 드문예이다. 따라서 이 석탑은 벽돌탑을 모망한 석탑(모전석탑)으로 볼 수 있다 탑이 있는 이곳은 죽장사가 있던 옛 절터로 최근에 중창 하였다.
감실안의 약사여래불
포대화상은 명주 봉화현 사람으로 법명은 契此(계차)이다. 뚱뚱한 몸집에 얼굴은 항상 웃으며 배는 풍선 처럼 늘어져 괴상한 모습으로 지팡이 끝에다 커다란 자루를 걸러메고 다니는데, 그 자루 속에는 별별 것이 다 들어있어서 무엇이든 중생이 원하는대로 다 내어주어서 포대스님이라고 불렀다. 무엇이든 주는대로 받아먹고 땅을 방바닥으로 삼고 구름을 이불 삼고서 어느 곳에서든지 벌렁 누워 태평하게 코를 골며 이마을 저마을 돌아다니면서 세속사람들과 같이 차별없이 어울리면서 길을 가르치고 이끌었다. 연꽃과 같은 삶이었다. 그는 자연과 더불어 자고 깨었으며 자연과 더불어 행하였고 대자연으로 돌아간 걸림없는 대자유인이었다.천백억으로 몸을 나누어도 낱낱이 참 미륵일세 항상 세인에게 나뉘어 보이건만 아무도 미륵임을 아는 이 없네 게송을 남기고 반석위에 단정히 앉은채로 입적하였다
彌勒眞彌勒(미륵진미륵) 미륵 참 미륵이
分身千百億(분신천백억) 천백 억의 몸으로 나투어
時時示市人(시시시시인) 때때로 시속 사람들에게 보이나
市人自不識(시인자불식) 시속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더라.
我有一布袋(아유일포대) 나에게 한 포대가 있으니
虛空無罣碍(허공무가애) 허공에 걸림이 없어라.
展開邊宇宙(전개변우주) 열어 펴면 우주에 두루하고
入時觀自在(입시관자재) 오므리면 관자재로다.
나에게 하나의 포대가 있다는 것은 무한 광대한 자신의 마음이다. 허공처럼 텅 비고 넓다.
걸릴 것이 없다. 이 우주에 꽉 차고도 남는다. 그래서 자유자재하게 드나든다.
삶에 걸리는 것은 없다. 자신이 이미 저 드넓은 우주와 하나가 되었다. 유유자적하며
소요자재하다. 세상에 무엇이 있어서 그를 장애하겠는가. 대자유다. 툭 터진 무한의 삶이다.
원효대사께서는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 大乘을 이렇게도 설명하였다.
크다고 말하자니 안이 없을 정도로 작은 곳에 들어가고도 남음이 없고
欲言微矣 苞無外而有餘
작다고 말하자니 바깥 경계가 없을 정도로 큰 것을 싸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다.
경봉(敬奉) 총무스님의 사찰안내와 5층석탑의 영험담에 고찰순례단원들의 박수가 터지기도 했다.
'백팔(108)천년고찰순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리암 / 12월 27일 제8차 (21) (0) | 2009.12.29 |
---|---|
도리사 / 11월 22일 제7차 (20) (0) | 2009.11.24 |
남장사 / 11월 22일 제7차 (18) (0) | 2009.11.24 |
영국사 / 10월 25일 제6차 (17) (0) | 2009.11.03 |
보석사 / 10월 25일 제6차 (16) (0) | 2009.11.03 |